줄리아 헤븐 김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그리움에 갇혀있던 기억들이 투명한 방울을 밀어내며 꿈틀거릴 때면 신기하게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눈물은 상기되어 가는 두 뺨 위에 세찬 물줄기를 대고 멈춰있는 시간 속으로 나를 끌어 당긴다. 그렇게 생성되는 또 하나의 시간을 즐긴다. 흐르지 않는 정지된 순간에 꼼짝없이 갇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선택의 고민과 생각 따위는 필요하지않다. 오롯이 그 안의 나를 찾아 교감하면 된다.
서있는 시간 속에 갇혀있던 수많은 기억들이 추억으로 그리움을 동반할 때면 순간이동을 하듯 단발머리 여중생이 되기도 하고, 양 갈래 땋은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되기도 한다. 샘 솟는 방울이 끌고 나오는 감정은 그때마다 시간의 주관자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다. 가끔은 아쉬움으로 남겨진 안타까운 시간의 멈춤도 있고, 후회로 점철된 딱한 시간도 섞여 있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걸 굳이 끼워 맞춰보면, 지금의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연민에 휘감긴 애틋한 시간이 더 많다. 아마도 추억을 품고있는 모든 기억이 현재가 아닌 이미 지나간 과거의 시간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같은 의미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궤변을 혼자만의 암호처럼 추억을 ‘서있는 시간’으로 은유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예전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나 정황을 곱씹어 봐도 서 있는 시간 안에는 행복하고 신나는 기억밖에 들어있지를 않았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내가 우선이고 내가 옳았던 기억들만 떠올려졌다.
예전엔 그랬는데…’라는 자아도취에 흥겨워 물 표면에 비친 내 모습에 취해 시퍼런 물 속도 마다 않고 뛰어드는 어리석은 나르시스와 같았다. 그런데, 나이에 붙어가는 숫자가 커져갈수록 소환되는 추억이 명화의 한 장면이 아닌 감정도 예전과 다름을 스스로 조금씩 인지하고 있다. 일인칭 주관 자로 통치하던 서 있는 시간 속의 세상에서 이인칭 또는 제 삼자의 시선으로 멈춰있는 시간 속의 내 곁에 서 있는 여유도 생겨났다.
최근에 신인 트로트 가수, 임영웅을 통해 ‘바램’이라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노랫말은 나의 멈춰 서 있는 시간과 아무런 관련도 없을 뿐더러 소환될 어떠한 기억도 연계된 것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구절에서 눈물이 마구 솟구쳐 올라왔다. 까닭 모를 물기를 노래가 끝날 때까지 연신 훔쳐내야 했다.
작은 감동의 해프닝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연시를 한 입 베어 물다 달콤하고 향긋한 홍시 향이 혀 끝에 감아 돌며 심금을 울리던 노래 소절이 생각났다.
과일이 가장 맛이 좋고, 지닌 향으로 고유의 특성을 제대로 뿜어낼 때가 환갑을 지나 고희, 산수가 되어 세상 이치에 달관한 멋스러움이 연륜에 묻어나는 사람과 조금은 닮은 듯한 억지 논리를 펼쳐본다. 그래서, 늙는다는 것은 개 개인 스스로 만들어가던 독창적인 향속에 나 혼자가 아닌 너와 나, 나와 우리라는 향을 적절하게 배합하고 섞어 선한 영향력을 지닌 향이 몸에 배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맛 보지 못한 수많은 과일이 있듯 아직 맡지 못한 무수히 많은 향이 있다. 왠지 나의 서 있는 시간 속에도 향기가 묻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풋내 올라오는 애송이의 싱그러운 향, 설레던 첫 사랑의 상큼한 향, 반면에 질투와 시기로 유쾌하지 않은 냄새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는 시간의 향도 있을 것이고… 어찌되었든 좋은 향과 나쁜 냄새 모두 멈춰 서있는 시간 속에 담긴 나의 옛모습이다.
그렇기때문에, 좋은 생각과 좋은 행실을 바로 조금 전, 서있는 시간 안에 차곡차곡 채워 넣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맡아 본 향내 중에 단연코 으뜸인 향이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향기이다. 너무나 포괄적인 그의 사랑의 향기에 나도 한 가지 향이라도 빚을 수만 있다면… 그 바람으로 지금 딱 한가지 만들어 가고 익어가도록 애를 쓰는 향은 있다.
“너희 가운데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복음 8장7절의 사랑의 향과 고결한 맛을 전수받아 돌을 내려놓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 돌을 던지면서도 던지는 줄 모르는 아둔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손 안에 쥔 돌로 인해 악취가 진동하지 않도록, 내 안의 교만과 오만 그리고, 자만이 빚은 위선과 시기와 분노로 썩은 오물은 모두 쏟아내고 걷어내어, 은은하게 겸손이 익어 갈수 있도록, 그렇게 나이 들어 가고 싶다.
그리움, 사랑… 나의 서있는 시간이 삶이 정지되는 시간과 맞닿을 때,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서있는 시간 속에 “그래도 줄리아의 향기가 향긋했네...” 라고 한다면, 나는 흐르는 시간 속에 행복한 사람으로 살다 간 정말 복 있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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